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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참는 것과 남는 것

June 2018. 7. 27. 01:30

신입사원 때의 일이었다. 한참 더운 여름, 프로젝트 사무실이 있었던 작은 건물에 들어서니 경비 아저씨가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매일 퇴근할 때마다 사무실 문을 열쇠로 잠그고 경비아저씨께 드렸기 때문에 안면은 있었지만 가벼운 인사 외에는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데 왜 그러시는지 궁금했다.


평소처럼 가볍게 인사하고 2층으로 올라가서 사무실 문을 열었더니 아무도 없었다. 내가 조금 일찍 출근했나 생각하고 자리에 앉아서 노트북을 펼치는데 경비아저씨가 사무실에 올라오시더니 혹시 뒷자리에 앉아있던 사람 잘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아, 예. 회사는 다르지만 저희 파트에서 일하시는 과장님 입니다.


그러자 경비아저씨가 갑자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며 흥분하셔서 매우 빠르게 말을 뱉어내셨는데, 처음에는 정리가 잘 안 됐지만 가만히 들어보면서 정리를 해보니 그 과장님이 어제 새벽 2시던가 3시에 자고 있는 경비 아저씨를 깨워서 열쇠를 받아서 사무실 문을 열더니 자기 자리에서 짐을 챙기면서 여기저기 발로 차고 침을 뱉고 욕설을 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갔다는 것이었다.


그분이 그럴 분이 아닌데 왜 그러셨을까 생각하고 있으려니 경비 아저씨는 내려갔고 사무실엔 다시 나만 혼자 남았다. 그래서 슬쩍 뒷자리를 보니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프로젝트에서 나가신 걸까. 뭔가 사정이 있으셨겠지만 같은 파트인데 그 정도면 나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파트 회의를 하면서 대충 전후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 여차여차 해서 프로젝트에서 그 분이 나가게 되었고 다른 분이 대신 들어올 것이다. 그분이 맡아서 개발하던 코드는 네가 맡아서 개발하거라.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가서 그분이 맡아서 개발하던 코드를 받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분이 왜 나갔는지 이해했다. 받은 코드를 휴지통에 던지면서 내 프로젝트는 오늘부터 새로 시작한다고 봐도 되겠다고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어려운 미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간 천당과 지옥을 오가면서 뒤처진 진도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프로젝트의 일정에 맞추어서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게 정말 될까?' 싶은 마음으로 실행했는데 정말 될 때의 기분은 개발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만든 것을 공유하고자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여기저기에 보여주고 다녔는데, 너무 여기저기에 자랑하고 다녔는지 PM 님이 고객에게도 한 번 보여주자고 이야기했다.


고객 시연이라는 것은 개발 프로젝트에서는 많은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광역으로 시전하는 스킬에 해당하는데, 신입사원이었고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나는 당시에 고객 시연을 오히려 기다렸다. 자, 고객님. 제가 만든 것을 봐주세요. 우리 프로젝트의 이슈였던 기능이 이렇게 동작하는 것을 상상이나 하셨습니까?


프로젝트에 하나밖에 없던 회의실에서 이루어진 고객 시연은, 전체 프로젝트 중 내가 만든 기능만을 대상으로 했기에 매우 소박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고객, PM, 그리고 나까지 3명이 참여한 시연에서 프로그램의 로직과 원리를 설명하고, 알고리즘을 이야기하고, 실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 고객이 나에게 한마디 했다.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에서는 보기 드문 창의적인 코드였다고.


시연이 끝나고 고객이 돌아가고, PM 님께 많은 칭찬을 들은 뒤 자리로 돌아가면서 실제 프로젝트에서도 뭔가 통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그렇게 좋아진 기분은 보름이 지날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10월 4일. 프로젝트 종료를 한 달 앞두고 만든 프로그램을 인수인계하기 위한 회의에 들어갔다.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남아서 운영업무를 계속할 사람들에게 자신이 했던 작업물을 넘겨주어야 했던 것이다. 프로젝트의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담당자들에게 결과물을 인수인계했고, 어느덧 내 차례가 되었다. 여전히 좋은 기분과 넘치는 자신감과 싱글벙글한 표정을 가지고 회의실에 들어가서, 보름 전 고객 시연 때 설명했던 내용을 똑같이 설명했다. 사실은 그사이에 프로그램에 부족한 부분도 보완했고 자료도 더 많이 만들어서 훨씬 매끄럽게 설명할 수 있었다.


설명이 끝나고 상큼한 표정으로 담당자였던 부장님을 쳐다봤다. 그러자 부장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이걸 어디에 쓰냐? 이렇게 만들면 누가 쳐다보기나 하겠냐? 회의실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기분이었다. 조명이 나간 것도 아닌데.


만들어야 하는 기능은 프로젝트가 시작할 때 이미 결정된 것이고, 나는 기능목록에 적힌 목표를 달성 - 내 생각엔 초과 달성 - 했을 뿐이니 프로그램의 쓰임새를 저에게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용처가 불분명하다고 기능목록에 있는 기능을 만들지 말까요? 라는 식의 말을 신입사원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바보같이 예? 라고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부장님은 이미 흥미가 떨어진 표정으로 문서 같은 거 다 만들었으면 파일서버에 저장하고 위치나 쪽지로 보내주라고 하고 회의실을 나갔다.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다른 회의도 있었기 때문에 회의실에 계속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도 바로 일어나서 회의실 밖으로 나갔고, 곧이어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당시 사무실은 명동에 있었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기저기 골목으로 들어가고 들어가서 간신히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장소를 찾고는 주저앉아서 서럽게 울었다.


울음이 그치고 대충 수습한 뒤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몇 번을 더 울어야 이 세계에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감이 오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저 컴퓨터 안쪽에 있는 세계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컴퓨터 바깥쪽의 세상도 배워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무실에 다시 들어왔더니 너무나도 일상적인 풍경이 나를 반겼다. 자리에 앉아서 만들었던 프로그램과 소스코드, 그리고 문서들을 파일서버에 복사하면서 생각했다. 저 부장님은 너무 무례했지만 내가 참고 넘어가겠다고. 그런 경험이 쌓이면 뭔가 남는 게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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