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 비공식적인 의뢰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홈페이지 하나만 만들 수 있어?" 미천한 저를 믿고 뭔가를 부탁한다는 사실에 무척 고무된 저는 제 실력과 상황을 따져보지도 않고 바로 "그럼요"라고 먼저 대답한 뒤 고객의 요구사항을 파악했습니다. "어떻게 만들어드릴까요?"보통 자신이 의뢰하고자 하는 개념의 실체를 잘 모르는 고객의 요구사항은 매우 추상적으로 단순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때의 고객은 '홈페이지'라는 단어를 발음하기조차 쉽지 않아 보였고, '요즘 그런 게 있다던데 하나 가져와 봐라' 정도의 느낌으로 의뢰를 줬기 때문에 저는 약간의 대화를 통해서 모든 요구사항을 제가 아는 지식과 기술의 범위로 끌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게시판 같은 건 필요 없고 그냥..
"가서 순찰로나 슬슬 한 바퀴 돌고 와"순간 본분을 잊고 "예?"라고 대답할 뻔했습니다. 아, 여긴 군대였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행정보급관님이 당직사관 완장을 차는 것을 도와드리며 되도록 평온한 말투로 되물었습니다."밖에 지금 비 내리기 시작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그러니까 한 바퀴 돌고 와야지. 길 얼마나 미끄러운 지도 확인해보고, 어디 무너진 곳 없는지도 좀 보고"잠시 창밖을 내다봤습니다. 해가 어둑하게 진 바깥에는 봄비가 아늑하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참으로 편안한 기분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당직사관의 단호한 명령을 당직부사관이었던 제가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복도로 나가서 근무명령서를 찾아봤습니다. 곧 지금 초..
서울의 지하철은 어느 때나 붐비는 편이지만, 명절이 되면 상대적으로 한산해집니다. 어느 설날 오전의 지하철도 평소보다 빈자리가 많았습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인터넷 곳곳에 올라오는 명절 피해사례들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핸드폰에 깔아 두었던 업무용 메신저가 울렸습니다. 휴일에 업무용 메신저가 울리는 것은 공포영화의 도입부에서 별로 비중 없던 캐릭터가 주변을 살펴보겠다며 혼자 나가는 것만큼이나 불길한 일이었기 때문에 저는 대범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면서 메신저를 열고 메시지를 확인했습니다.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메신저에는 운영 중인 서버가 다운되었다는 다급한 메시지가 가득했습니다. 바로 두통이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두통이 찾아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저희 일에서 '운영'이라는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