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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cho

June 2021. 4. 5. 02:22

갑자기 언젠가 어릴 때의 주의력 결핍이 성인이 되면 불안장애로 이어진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의가 산만한 아이가 분별력과 집중력을 가진 어른이 될 것을 강요받기 시작하면, 그 산만함이 내재화되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불안감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이라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덜 불안해하는 편인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금 전 읽기 시작한 책을 대충 옆에 던져놓고 TV에서 재생되는 유튜브 영상에서 그렇게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 지식을 습득하면서 동시에 노트북을 켜놓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일들을 하다가 막 옆에 있던 핸드폰을 들어 올리면서 한 생각이었다.

들어 올린 핸드폰의 화면이 자동으로 켜지지 않길래 핸드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나는 그냥 아직도 산만해서 덜 불안해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을 몇 번 두들겨도 화면이 여전히 켜지지 않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듯한 기분을 삼키며 측면의 전원 버튼을 눌러봤다. 하지만 핸드폰은 여전히 검은 화면을 유지하고 있었고, 전원 버튼을 짧게 길게 몇 번 더 꾹꾹 누르면서 산만함이 사라지며 거대한 불안감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누르고 있는 게 전원 버튼이 맞나? 이거 시리 호출 버튼 아니었던가? 아, 시리 호출 버튼이 전원 버튼이었나? 평소에 내가 그걸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었나? 무언가가 붕괴되고 포화되는 기분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동원 가능한 최대한의 침착함을 유지하며 핸드폰에게 명확한 의사를 전달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실수로 잘못 누를리가 없었던 명시적인 버튼 누름에도 핸드폰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척추 건강에 안 좋은 자세에서 좋은 자세로 바꿔 앉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요즘 핸드폰이 가끔 먹통이 되는 증상이 발생했었고, 그래서 나는 해결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볼륨 증가 버튼 짧게 한 번, 볼륨 감소 버튼 짧게 한 번, 그리고 켜질 때까지 전원 버튼 길게 누르기. 수패고를 시전 하는 듯한 기분으로 리셋 커맨드를 입력하고 전원 버튼을 누르며 사과 로고가 화면에 뜨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간절함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커맨드가 부정확했는지 핸드폰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전의 먹통 현상을 경험했을 때는 대부분 이 단계에서 핸드폰이 다시 켜졌기 때문에, 핸드폰이 켜지지 않는 분기는 경험이 부족했다. 딱 한 번 핸드폰이 한참 켜지지 않았던 적이 있어서 A/S 센터를 찾아본 적은 있었는데 다행히도 A/S 예약을 하기 직전에 핸드폰이 다시 켜져서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핸드폰이 켜지지 않았을 때의 행동요령 - (1) 가까운 A/S 센터를 빨리 찾아서 예약한다 (2) 그 이후는 모르겠다 - 을 따라가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내일은 주말인데 A/S 센터가 영업을 하나? 불안감에 또 다른 불안감이 결합하여 압도적인 힘의 패닉이 탄생하려던 위기의 순간, 다행히도 토요일에 예약 가능한 서비스 센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진정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내일 예약 가능한 유일한 서비스 센터가 홍대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도저히 잠실에서 홍대까지 1시간 30분의 거리를 핸드폰 없이 멀뚱히 앉아서 갈 자신이 없었다. 대학생때는 스마트폰 없이 하루 5시간씩 통학을 했었는데 그때는 꿈도 많고 상상력도 풍부하던 시절이라서 버틸 수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갔다가 수리를 못한다면 다시 핸드폰 없이 1시간 30분을 돌아와야 하는데 그것 또한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고 결국 나는 용기 있게 서비스 예약을 누르지 못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서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을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찾아봤지만, 결국 내가 얻은 소득은 아이폰이 먹통이 되었을 때의 해결책을 구글에서 검색하면 '잘 껐다 켜보세요. 파이팅!' 같은 글만 잔뜩 나온다는 점을 알아낸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다시 열심히 잘 껐다가 켜봤지만 핸드폰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위 - 아래 - 전원 콤보를 반복해서 시도했지만 핸드폰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결국 핸드폰이 완전히 고장 났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아이팟을 열심히 쓰던 시절부터 자주 겪어봤기 때문에 이럴때 시도할 만한 것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핸드폰을 복구시키는 것. 왜 애플이 복구라는 단어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복구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따뜻함과 다르게 애플의 복구는 그냥 기기의 데이터를 완전히 날려버리고 초기화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새 뭔가 문제가 있어서 핸드폰이 자동 백업이 몇 주째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니 뭔가 많이 우울해졌다. 내가 복구에 성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날려먹을 데이터의 양이 어느 정도일까. 하지만 안 켜지는 핸드폰보다야 데이터가 다 날아간 핸드폰이 더 가치 있는 법이니, 착잡한 심정으로 핸드폰을 노트북과 연결하고는 초풍신을 넣는 듯한 기분으로 정확하게 복구 커맨드를 입력했다.

사실 핸드폰이 완전히 날아갔다면 노트북에서도 핸드폰이 잡히지 않고, 복구 자체를 시도하지도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파인더에 핸드폰이 뜨고 복구를 시작할꺼냐는 창이 나왔을 때에는 그래도 복구를 할 수는 있구나라는 안도감과 함께 몇 주치 데이터가 확정적으로 날아갔다는 실망감이 섞여서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복구를 시작했고, 곧 괴이한 에러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현재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서버에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해당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수 없습니다.'

해당 문구를 처음 봤을때는 살짝 멍한 기분이 들었다. 저게 무슨 소리야? 주어는 어디 갔지? 번역 똑바로 한 거 맞나?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서버 오류라면 몇 번 재시도하면 다시 된다는 소리인가? 아직 데이터가 확정적으로 날아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막상 하려던 일을 못하니까 묘하게 오기가 생기는 기분이라서 복구를 몇 번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매 시도마다 똑같이 알 수 없는 내용의 에러 메시지를 내뱉으며 복구 모드 진입에 실패했고, 결국 나는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냥 서비스 센터에 가지고 가자. 가면 고쳐주든지 바꿔주든지 뭐 어떻게 해주겠지. 하지만 여전히 핸드폰 없이 1시간 30분을 이동할 자신은 없으니 집 근처로 예약하자.

다음 주 화요일의 서비스 센터 방문 예약을 마치고서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노트북과 핸드폰을 대충 근처에 던져놓고, 올바르게 앉아있던 자세를 척추 건강에 안 좋은 자세를 거쳐서 척추에 무리가 가지 않는 자세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축 늘어졌다가 그대로 드러누웠다는 말이다.

누운지 10초 만에 핸드폰을 집으려고 팔을 뻗었다가 아차 하면서 다시 팔을 회수하고 천장을 바라보며 핸드폰 없이 버텨야 할 사흘에 대해서 생각했다. 다행히도 내일과 모레는 주말이고, 월요일은 재택근무이니까 어디 이동할 일은 없겠네. 영상이야 노트북이나 TV로 보면 되는 거고, 메신저야 노트북에도 설치되어 있고, 핸드폰에 연결해둔 각종 IoT 장비들, 그러니까 청소기라든지, 공기청정기라든지, 조명 같은 것들은 '스위치'라는 물리적인 힘을 전기적 신호로 바꿔주는 놀라운 컨트롤러가 있으니까 그걸 사용하면 되는 거고, 어차피 전화는 택배나 TM 아니면 온 적이 없으니 별로 걱정 안 해도 될 거고, 생각보다 내 인생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핸드폰에 종속된 인생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결합도가 높지는 않은 것 같아서 마음이 살짝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그렇게 자세히 쳐다본 적은 없었기에 낯설게 느껴지는 천장을 바라보며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문제는 OTP가 다 날아가버린 덕에, 서버가 터졌을 때 콘솔에 로그인할 방법이 없어졌다는 것인데 애초에 전화가 안 되니까 서버가 터져도 연락을 못 받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문제가 터지면 누군가가 해결하겠지. 방만하게 드러누워있는 자세 때문인지 뭔가 불안감들이 될 대로 되라는 생각에 필터링되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요즘의 핸드폰은 본연의 전화와 문자 기능에 컴퓨터나 TV, 게임기 등등에서 되는 부가적인 기능들이 결합된 형태로 만들어지기에 역설적으로 핸드폰이 없다고 해도 그 본연의 전화와 문자 기능만 포기하면 일상 생활에 별다른 지장이 없다는 점이 재미있는 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컴퓨터나 다른 IT기기를 끼고 살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핸드폰을 끼고 사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전화와 문자 기능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는 점은 사실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만큼 커뮤니케이션의 형태가 많이 바뀌었고, 고전적인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은 비중이 줄었다는 뜻이겠지. 라고 생각했다가 그럼 요즘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은 활발하게 하고 있었나라는 의구심이 들어서 뭔가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대학교 3~4학년 시절이었고, 그 뒤로 활동량은 쭉 내리막을 그렸는데, 아마도 다양한 사건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드러내기보다는 숨기는 쪽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계속 그랬던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고, 옛날에도 그렇지만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 특히나 대학생 시절에 나는 정말 최상급의 이벤트 리스너(Event Listener) 였는데, 다양한 - 대부분은 얼굴도 모르는 - 사람들의 컴파일 오류에서부터 인생 오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적절한 추임새나 일정확률로 적절한 조언을 돌려주고 있으면 마치 내가 인기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하루에도 수십 개의 질문을 받던 대학생 시절에도, 노트북 뭐 사는게 좋을까요 - 공대생은 싱크패드 사시면 됩니다 / 이거 과제가 안 풀려요 - 제 기억이 맞다면 컴파일러에 옵션 설정해야 돌아갈걸요 / 이 교수님 수업 괜찮을까요? - 아니, 문과대 수업을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일단 수강 계획서부터 같이 보시죠 / 올해 벚꽃 개화 시기가 언제죠? - 인천은 이미 끝났고, 이제 벚꽃 보시려면 월북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 등등의 답변을 주면서도 정작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은 물어볼 곳이 없어서 답은 얻지 못했다. 그래서 프로그래밍에 별로 재능이 없는 내가 개발로 취업을 하는 게 맞는 일일까요? 더 늦기 전에 기획이나 디자인으로 진로를 바꾸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그 질문은 물어볼 곳도 없었고 답도 없어서 막상 나는 인생에서 가장 신중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던 취업시기에 원서를 되는대로 집어넣었는데, 어떤 회사는 기획으로 지원하고 어떤 회사는 개발로 지원하고 어떤 회사는 디자인 쪽으로 지원하는 식이었다. 당연히 좋지 못한 전략이었고 결국 나는 모든 취업에 실패해서 졸업을 반년 연기하고 다음 턴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때쯤부터 다른 사람의 인생에 신경쓰기 보다는 내 인생부터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인생에서 '변했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던 시기도 그때쯤이었던 것 같았다. 그 뒤로도 나는 여전히 끈기 있는 리스너였지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 말을 아끼려고 했던 것 같았고, 정말 친한 사이가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나 생각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을 내가 흥했는지 망했는지 정도만 궁금해하지 않을까 싶어서.

컴퓨터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때가 되면 반드시 한 번은 에코 서버(echo server)를 만든다. 이건 소켓 통신의 기초라서 꼭 한 번씩은 만드는 것인데, 에코 서버란 서버와 클라이언트가 소켓을 통해 데이터가 주고받는 동작을 가장 간단한 형태로 구현해보기 위해서, 클라이언트가 전달한 메시지를 받아서 그대로 돌려주는 서버를 의미한다. 사실은 그렇게 산만하지는 않은 내가 불안감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얻은 나름의 합리적인 결론에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나 고민, 생각들은 에코 서버처럼 나 자신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드디어 OTP를 쓰지 못하는 것 외에 핸드폰이 없을때 생기는 큰 문제를 알아냈다. 예전에도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는 항상 핸드폰으로 뭐라도 보는, 불면증 해결에 매우 안 좋은 행동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던 것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은 뒤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때마다 항상 불안감이 밀려 올라와서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켜지지 않는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드러누워버린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나는 주로 핸드폰을 이용해서 별로 생산적이지 못한 활동을 통해 나 자신을 매우 산만하게 만들어서 불안감을 흐리는 전략을 많이 취했던 것이다. 하지만 핸드폰이 고장 난 지금은 불안감을 지우기 위한 간편한 수단이 사라져 버렸으니 정말 인생의 큰 고비가 찾아온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주말은 뭘 해야 산만하게 지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봤다. 사실 방법은 많았다. 한동안 안 했던 게임을 다시 켜서 런던에 대규모 폭탄 테러를 일으킨 해커 집단에게 복수하는 것들부터, 마침 봄이 왔으니까 대청소를 한다든지, 얼마전에 산 책을 읽으면서 열역학에 대해 다시 알아보는 것까지. 아니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들의 일부를 은닉시키고 외부에 공개할 수 있는 것들만 정제하여 캡슐화한 뒤 글로 쓰는 것도 충분히 시간을 소모할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 이야기를 하려면 내 핸드폰이 어쩌다 고장 났는지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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