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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008/12/31 10:17

1. 누구도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아니, 12월 25일은 평범한 날이라고 하기는 어려운가요? 온 세상 연인들에게는 대단히 특별한 날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평범한 날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막 크리스마스 이브가 지나서 크리스마스가 되던 25일 새벽. 인하대학교 홈페이지는 돌연 '업데이트'를 위해서 학생들이 말 그대로 자유롭게 글을 올리던 자유게시판의 접속을 차단시킵니다. 어떤 홈페이지가 개선을 위해서 새벽에 업데이트 하는 것도 평범한 일이지요? 평범한 날에 어울리는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다시 홈페이지가 멋진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아침이 되도, 다시 저녁이 되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홈페이지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2. 크리스마스 이브. 무언가가 일어났었습니다.

자유게시판(인하대학교 학생들은 자유토론장 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합니다. 올해 개편이 있기 전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었던 명칭이었기 때문이죠.)이 폐쇄되기 하루 전날인 12월 24일. 인하대학교에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학교에서는 성적공시를 했지요. 누군가는 그 선물에 격하게 기뻐하고 누군가는 격하게 선물을 부정했지요. 뭐, 그건 어느 학교에나 다 있는 풍경이니까 특이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대학교 총장이 전혀 예고도 없이 사표를 제출한 것은 조금 특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성적공시가 이루어지던 12월 24일 17시. 2002년 부터 인하대학교 총장에 재직하셨던 홍승용 총장님은 임기를 1년 넘게 남기고, 학교측에 사표를 제출합니다. 적어도, 적어도 학생들 중에 '총장님이 곧 사표를 내겠지'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총장님이 사표를 냈다는 소식에 대한 첫번째 반응이 '낚시 하지 말아라'였고, 대부분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지역 신문발로 속보가 뜨기 시작하자 많은 학생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이야? 왜? 재단에선 그걸 받아들였어? 아니 근데 도대체 왜?

당황이 의아함으로 바뀌고, 그 의아함이 체계를 갖추기 직전, 크리스마스 선물과 총장 사퇴라는 두 가지로 혼란스럽던 인하대학교 자유게시판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업데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3. 학생들은 총장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전통적으로 대학생과 대학교 총장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학교는 매년 등록금을 인상합니다. 그리고 그 학교의 대표자는 총장이지요. 시대가 바뀌기는 했지만, 학생들에게는 특히 학생회는 투쟁을 할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매년 물가 상승률을 훌쩍 뛰어넘는 등록금 인상률을 제시하던 학교는 '악'으로 규정하기에 나쁘지 않았지요. 총장은 저울의 반대추와 같은 존재입니다.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입장이 되어야 됐습니다. 학교가 너무 좁아요! 넓혀 주세요! 넓혀주면 좋지만, 넓히지 않은 것은 총장이 책임져야 될 일이지요. 적어도 '땅이 없어서 넓히기 어렵다.'라고 말하고 욕을 먹어야 되는 것도 총장입니다. 우리 과에 투자가 안되는 것도, 우리 강의실에 난방이 잘 안되는 것도, 학교 호수가 지저분한 것도 결국 '학교'측의 책임이 되어야 됐고, 학교의 최고책임자는 총장이지요.

그런데 인하대학교에서 학생들과 총장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이한 일이지요? 무조건 좋다고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근 몇 년간 본관 점거 같은 행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수천의 학생들이 촛불을 들어서 총장님께 항의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시위'는 총장을 향했다기 보다는 학교를 향한 것이 맞다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홍승용  총장이 부임한 이래로 학교는 꽤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환경도 좋아지고, 송도 캠퍼스 유치나 로스쿨 유치같은 학교의 인지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유치전에서도 모두 승리하고, 건물들도 착실하게 리모델링 되고 있었고, 전략적으로 도입한 신규 학과들도 평이 좋았지요. 자기 학교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건 거의 모든 학생이 공유하는 감정일 겁니다. 그리고 홍승용 총장 이후 우리 학교는, 분명하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등록금 낼 때를 제외하면 총장님을 욕할 필요를 거의 느끼지 못했지요. 내년도 등록금을 동결해야 된다는 발언을 제일 먼저 꺼내고, 실제로 등록금 동결을 시행한 총장님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적어도 총장님이 떠나는 걸 원한 학생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건 확실하지요.

4. 지금은 방학입니다.

방학은 학생들이 학교를 가지 않는 기간을 말합니다. 물론 계절학기가 진행되고는 있지만 그건 논외로 하지요. 학생들은 총장님 사퇴 소식을 대부분 개별적으로 접해야 됐습니다. 그리고 그 황당함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과 이야기 할 수는 없었습니다. 방학이니까요. 대학생들은 방학이 되면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잖아요. 부산에 사는 친구와 광주에 사는 친구가 '우리 총장님 사퇴에 대해서 대전에서 만나서 이야기 해보지 않을래?'라고 하기는 어렵잖아요. 정보화 시대에 이게 무슨 헛소리냐구요?

예. 그 정보화 시대가 문제이지요. 우리나라의 아주 높은 분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요. 의사교환이 지역적인 제한 없이 너무 자유롭게 흘러가잖아요. 그게 온라인 상에서만 이루어지면 그나마 낫겠죠. 그런데 여기는 대학교잖아요. 어쨌든 공통의 감정이 당황과 의아함을 넘어서서 결의 라든지 분노 같은걸로 진행되면 집단 행동으로 표출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건강 때문에'라는 정치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이유가 아닌, 떠도는 소문 처럼 재단과의 마찰이 총장님의 사퇴 사유라면요. 그 소문이 어느정도의 신뢰성을 가지게 되도록 검증이 된다면 학교 측에서는 반갑지 않은 일이겠지요.

5. 다시 크리스마스로 돌아가겠습니다.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학교 홈페이지는 업데이트에 들어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인하광장'만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성적공시가 이루어지던 수강신청 사이트, 이클래스, 신입생 안내, 학교 소개, 전부 정상적으로 작동했습니다. 공사중인 곳은 학교 전체 시스템중 자유게시판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 사이트. 그게 전부였습니다. 공지는 없었습니다. 예고도 없었습니다. '더 나은 모습으로 서비스 하기 위해서 업데이트에 들어갔다.'라는 alert 창이 전부였습니다. 학생들은 예고도 없이 끊긴 수도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되어야 됐습니다.

인하대학교 학생들이 집결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아주 많은 것은 아닙니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외부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몇 몇 대학들과는 달리, 인하대학교는 주로 학교 홈페이지 내의 자유게시판에서 교류가 일어나는 편이었습니다. 27만개의 글이 올라온 게시판은 농담으로라도 활발하지 않다고 하기는 어렵겠지요. 여기에 견줄만한 커뮤니티는 DCINSIDE의 인하대학교 갤러리 정도가 있겠네요. 여기도 매우 활발하지요. 하지만 DCINSIDE내에 있다는 것은 태생적인 한계점이 조금 있잖아요. 학생들이 결집하기는 좀 어렵죠. 자유게시판 쪽이 조회수가 훨씬 높기도 하구요.

학생들은 예고도 없이 끊겨버린 접속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사가 하루 이틀을 넘어서서 장기화 되자 더더욱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총장 사퇴와 자유게시판 폐쇄를 연관 짓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농담이었죠. '총장님 물러나니까 여론 막으려고 자유게시판 닫은거 아냐?' 재미있는 이야기 였지요. 그런데 폐쇄가 5일을 넘어서자 그건 더 이상 농담이 되지 않았습니다. 설마 진짜로 그것 때문 이었을까요?

6. 결국 총장님은 퇴임하셨습니다.

12월 30일 오전 11시. 총장님은 이임식을 하고 총장직에서 사퇴했습니다. 예, 그건 기정 사실이 되었고 총장님이 결정한 문제니까 더 이상 그게 어떤 배경이었는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12월 30일 오후 4시. 설마 총장님이 이임식을 하고 나자 자유게시판이 열렸을까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울 겁니다. 설령 '여론 차단'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자유게시판을 폐쇄했다면, 1월 1일에 여는 것이 변명하기에 좋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업데이트를 완료. 좀 멋지잖아요. 그런데 이임식 직후. 학교 자유게시판은 다시 열렸습니다.

너무 당당해서 할 말이 없을 정도였지요.

7. 자유게시판은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이전 자유게시판은 추천을 많이 받은 글이 인하광장 첫페이지에 10위까지 표시되었습니다. 제목은 로그인을 안해도 확인할 수 있었지요. 자유게시판이 폐쇄되기 직전 1위 글은 무엇이었을까요? 예. 물론 총장님이 사퇴했다.는 글이었지요. 이 글은 순식간에 100명의 추천을 받아서 1위에 올라갑니다. 이런 글은 노출이 잘 될 수 밖에 없지요. 순식간에 2850회의 조회수를 기록합니다. 하루도 되지 않아서요. 인하대학교 학생 수가 17,000명 입니다. 저 조회수는 어마어마한 것이지요. 졸업생을 고려해야 되지만요.

그런데 6일동안 업데이트된 자유게시판은 더 이상 추천을 많이 받은 글을 출력해주지 않았습니다. 추천제도는 여전히 있었지요. 로그인 하고 들어가서 'BEST 글 확인하기'버튼을 눌러야 표시가 된다는 것을 제외하면 뭐 확인은 할 수 있었지요.

그게 전부입니다. 6일동안 업데이트 한게 그게 전부에요. 세상에. BEST글 확인하기 버튼을 누르면 그냥 추천수 순서대로 10개까지 게시글을 정렬해주고 끝나네요. 여기에 사용될 SQL쿼리문은 학부생이라도 60초 내에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도대체 6일동안 뭘 한 걸까요?

8. 저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학부생입니다. 제가 아는 내용은 단편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이 많지요. 실무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게시판을 폐쇄한 다는 것은 DB에 변동이 없는 상황에서 업데이트를 수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업데이트를 6일간이나 수행해야 될 이유는 제가 아는 지식 범위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6일동안 DB를 가지고 뭘 한 것일까요? 레이아웃이 조금 바뀌기는 했는데, 레이아웃 바꾸는 업데이트가 DB를 폐쇄시킬 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번 업데이트는 제가 지난 4년간 배워왔던 모든 기본 상식들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간신히 짜맞춘 것은 '새로운 홈페이지를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설계하고 구현하고 테스트까지 하면 이 정도 규모는 6일 정도 걸릴 수도 있겠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기획 디자인 설계 구현을 홈페이지를 닫아 놓고 해야 됐을까요? 일단 사태가 터졌으니까 게시판을 업데이트 핑계로 닫아 놓고, 업데이트를 핑계로 했으니까 그 때 부터 부랴부랴 업데이트 기획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너무 자연스러워서 좀 슬플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의 여론통제를 당했다는 것, 그 학교가 우리 학교이고 그 학생이 저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9. 학교는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자유게시판이 열리자 학생들의 항의가 빗발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학교측에서는 전혀 대답이 없습니다. 제가 학교라도 별로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도 자꾸 학교 측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군요. 이해가 안되서 그런가 봅니다.

물론 모든 것은 추측입니다. 정말로 학교에서는 순수하게 총장님 사퇴와는 관계 없이 업데이트를 진행했을 지도 모르겠죠. 어쨌든 총장님은 사퇴했고, 학생들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습니다. 여론이란게 조성될 수 없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는 모든게 평화롭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학교에서 그 평화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과연 언제까지 침묵하고 있을지, 어떤 멋진 변명을 들려줄 지.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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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une